<성공적 핵무기 폐기 협상의 사례와 함의: 1987년 워싱턴 정상회담, 제주평화연구원>

(한인택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동북아에서 ‘정상회담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당초에는 4월 말 남북 정상회담, 5월 초 한중일 정상회담과 한일 정상회담, 5월 중 한미 정상회담, 5월 말 북미 정상회담의 순서로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라고 기대되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북중 정상회담이 먼저 개최되었고 북일 정상회담, 남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앞으로 상황의 전개에 따라서는 양자, 다자 정상회담이 더 많이 개최될 수 있을 것이다. 연이어 개최될 정상회담에 대비하고 최선의 결과를 낳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워싱턴 정상회담: 성과 없던 정상회담과 실패한 정상회담이 만들어낸 성공작

  역사적으로 정상회담은 위기에 대처하고 평화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대표적인 예가 1987년 12월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워싱턴 정상회담이다. 이 회담에서 미소 정상은 그다음 해에 있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한 한반도 긴장완화를 포함한 다양한 의제를 논의하였다. 워싱턴 정상회담의 가장 큰 직접적 성과는 중거리 핵무기를 폐기하는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의 조인이었다. 이 조약을 통해서 미소는 퍼싱-2나 SS-20와 같은 중거리 핵미사일을 폐기하기로 합의하였다. 퍼싱-2나 SS-20는 고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신속발사가 가능해서 상대방을 선제타격하는 데 이상적이었다. 따라서 중거리 핵전력 조약은 바로 미소 양국이 보유하고 있는 핵선제타격용 미사일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합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쉽지 않겠지만 미소 간의 핵경쟁과 냉전이 한창이던 당시의 시점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나아가 워싱턴 정상회담은 1991년에 미소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복합적인 군비통제조약인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을 체결하는 데 기여하였다. START의 결과로 2001년 기준 미국과 러시아가 보유한 전략핵무기의 80%가 폐기되었다. 이러한 결과를 보고 역사가들은 워싱턴 정상회담이 냉전의 종식을 낳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냉전의 종식을 과제로 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워싱턴 정상회담의 성공요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19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의 체결이 1987년 중거리 핵전력 조약의 체결을 바탕으로 한 것처럼, 워싱턴 정상회담의 성공은 그 이전에 열렸던 2회의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5년 11월 제네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가졌고, 1986년 10월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두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제네바 정상회담과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이 각기 성과가 없었던 회담(제네바 정상회담의 경우)이나 실패한 회담(레이캬비크 정상회담)으로 당시에 평가 받았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하고 채 1년도 되기 전에 개최된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미국이 소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고 레이건은 이에 대응해 소련이 공격적으로 행동한다고 비난하였다. 레이건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또한 인권문제, 특히 전략방위구상(SDI: Strategic Defense Initiative)을 놓고 팽팽히 대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네바 정상회담이 끝나고 공동성명은 발표되었지만 구체적인 성과가 있었던 회담은 아니었다.

  1986년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의 결과는 더 암울하였다.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회담이 끝나고 공동선언문조차 발표할 수 없었던 실패한 회담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미소 양국은 서로에게 회담 결렬의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으며, 회담 결렬로 인해 촉발된 것은 아니었지만 레이캬비크 회담이 끝나고 며칠 뒤부터는 미소 양국이 자국에 주재 중인 상대국의 외교관들을 추방하는 등 관계가 악화되었다.


워싱턴 정상회담의 성공요인

  성과가 없었던 제네바 정상회담과 결렬되었던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워싱턴 정상회담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우선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집권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중거리 미사일뿐만 아니라 모든 핵무기를 폐기할 용의가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에는 핵으로 인한 인류공멸의 위험성을 깊이 인식하였다는 점도 있지만, 그가 추구했던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평화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국방비를 축소할 필요가 있었고 평화, 특히 미국과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하였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집권은 이미 1985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집권 후 레이건과 가진 3번의 정상회담 중에서 처음 2번의 회담은 성과가 없었고 왜 마지막 회담만 성공하였는지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마지막 정상회담의 성공은 고르바초프의 인식과 진심을 레이건이 직접 확인하고 신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제네바 정상회담과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표면적으로는 성과가 없고 실패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두 차례의 만남을 통해서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의 인식과 진심을 개인적 차원에서 확인하였고 신뢰할 수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해 유명해진 밥 우드워드가 저술한 Shadow: Five Presidents and the Legacy of Watergate에 따르면 레이건은 치매로 인해서 그의 대통령 재임기에 대한 거의 모든 기억이 지워졌으나 유일하게 어느 아늑한 방에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 세계적인 지도자와 함께 화롯가 옆에서 대화를 하였던 것을 기억하였다고 한다. 레이건이 말하는 이 대화는 제네바 정상회담 때 고르바초프와 가졌던 대화이다. 치매로 인해 대부분의 기억이 지워진 후에도 생각이 날 정도라면 제네바 정상회담이 고르바초프에 대한 레이건의 인식을 얼마나 변화시켰는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변화한 것은 레이건만이 아니었다. 제네바 정상회담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이 결렬된 데에는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 에 대한 미소 간의 이견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어떠한 경우에도 SDI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던 고르바초프가 나중에는 SDI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 SDI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인식이 바뀌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SDI의 현실적 무용성에 대한 과학자들의 견해를 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르바초프의 이러한 인식변화는 엄격히 말하면 정상회담을 통하여 발생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가 정상회담을 통해서 레이건과 미국도 평화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미국을 계속 위협으로만 인식하였다면 과학자들의 객관적인 견해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레이건에 대해 갖게 된 이해와 신뢰가 고르바초프가 갖고 있던 SDI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를 잠재웠던 것이다.

인식을 변화시키고 신뢰를 구축하는 정상회담을 위하여

  정상회담을 통해서 각국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입장만을 되풀이 한다면 굳이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의의가 없을 것이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이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있다면, 성공적인 정상회담이란 인식의 변화와 신뢰구축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는 고르바초프 같은 전향적 지도자의 존재라는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비핵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북한은 진정한 평화가 핵무기를 개발하여 상대방을 핵전쟁의 공포에 떨게 할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 협력할 때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한편 다른 나라들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게 된 동기를 이해하고 북한의 우려를 완화하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 유럽이나 동남아에서는 일찍이 협력적 안보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졌으나 동북아에서는 그 단계까지 인식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인식의 변화는 단시간 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공동합의문 등을 통하여 문서화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너무 조급한 마음으로 정상회담에 임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표면적인 성과가 없더라도 심지어 결렬이 되더라도 정상회담을 통해서 상대방의 인식과 의사를 확인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서 커다란 성과이다.

  정상회담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식변화와 신뢰구축이 가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여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 단초는 다른 이 아닌 고르바초프에게서 찾을 수 있어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2번째 미소 정상회담을 앞두고 레이건 대통령에게 “런던 혹은 아이슬란드 정도의 중간 지역에서 만나 형식에 치우치지 말고 비공개로 군비 통제 문제를 솔직하게 논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김연철 저, 『협상의 전략』 281 페이지에서 재인용). 그 결과 제2차 레이건-고르바초프 정상회담은 인구 10만 명 남짓한 조용한 도시인 레이캬비크에서, 그것도 작고 외진 2층 건물에서 개최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제안은 그가 젊었을 때 흑해 연안의 휴양지에서 근무했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모스크바와 달리 휴양지가 주는 자유로움과 여유는 인식의 전환을 촉진하고 신뢰의 구축을 돕는다는 사실을 고르바초프는 경험을 통해서 알았던 것이다.

  한국은 그동안 G20 정상회의, 핵안보 정상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국가적으로도 위상을 제고하고 영향력도 강화한 바 있다. 이러한 경험을 살려서, 앞으로 개최될 정상회담 중의 일부는 한국에서 개최되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냉전 종식의 물꼬를 튼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간 한소 정상회담은 북한을 의식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제안으로 한반도 남단의 섬인 제주도에서 개최되었다. 만약 다시 제주도에서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한소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시작된 한반도 냉전 종식의 모멘텀이 바로 그 발상지인 제주도에서 결실을 보는 의의가 있을 것이며, 각국의 정상들이 제주도에서 고르바초프가 제안한 것처럼 형식에 치우치지 않고 허심탄회하게 논의한다면 한반도의 비핵화에도 한 걸음 더 가까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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