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역량 진전을 검증해 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한국 내에서 다소 잠잠해진 핵무장 여론을 다시 소환할 수도"

중앙일보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지난 4일 공동주최한 포럼에서 대담하고 있는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와 미라 랩-후퍼(Mira Rapp-Hooper)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사진=중앙일보 유튜브 채널 갈무리) 
중앙일보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지난 4일 공동주최한 포럼에서 대담하고 있는 빅터 차 CSIS 한국석좌와 미라 랩-후퍼(Mira Rapp-Hooper)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동아시아-오세아니아 담당 선임보좌관(사진=중앙일보 유튜브 채널 갈무리) 

미국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최근 잇따라 한반도 비핵화 과정에서 '중간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힌 데 대해 미국의 전문가들은 북한 핵 역량 검증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에반스 리비어 전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 부차관보는 9일 "최근 미국 정부 고위 당국자가 연이어 ‘비핵화 중간 조치’ 입장을 밝힌 것은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정책의 변화를 시도하려 한다는 메시지를 내비친 것”이라고 VOA에 말했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바이든 행정부 내부에 북한 비핵화 목표 달성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우려와 좌절감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무기가 계속 늘어나고 위협이 증가함에 따라 미국 정부가 유지해온 대북정책으로서의 ‘비핵화’가 효과가 없다는 우려가 행정부 내에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른바 ‘위협 감소’나 ‘군축 회담’과 같은 온건한 목표로 전환돼야 한다”는 ‘중간 조치’ 메시지가 잇따라 나온 것으로 해석했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바이든 행정부 관계자에게 미국의 대북정책이 바뀐 것이냐’고 질문한다면 모두가 ‘아니다’라고 답하겠지만, 그 같은 반응은 두 고위 관리의 발언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무부 출신의 토머스 신킨 ‘알스트리트 연구소’ 정책 담당 국장도 "바이든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잇단 ‘중간 조치’ 언급은 분명한 ‘정책 변화’ 신호로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다시 맞붙게 될 바이든 대통령이 북한과의 관여를 늘리고 성과를 내기 위한 시도에 나선 것으로 진단했다.

신킨 국장은 “바이든 행정부 기간 동안 우리는 북한 문제와 관련해 북한이 우크라이나전에 사용할 많은 탄약을 제공한 대가로 러시아로부터 미사일 지원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북러간 전략적 관계 강화를 지켜봐왔다”며 "대선을 앞두고 바이든 정부가 북한 문제에 대한 세간의 우려를 의식하고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라 랩-후퍼(Mira Rapp-Hoope) 백악관 선임국장은 지난 4일 서울에서 중앙일보와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가 공동 주최한 포럼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기존 정책 목표에 변함이 없다"면서도 "그 과정에서 ‘중간 조치’가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랩-후퍼 선임보좌관은 “미국의 목표는 여전히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며 “그러나 이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서 역내와 세계가 보다 안전해질 수 있다면 중간 조치를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박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겸 대북고위관리도 다음 날인 5일 워싱턴의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에서 열린 대담에 참석해 “비핵화는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며 ‘비핵화 중간 조치’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 매튜 밀러 국무부 대변인은 5일 정례브리핑에서 랩-후퍼 선임보좌관의 관련 발언의 의미에 대한 질의에 “그것이 정책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는 그동안 북한에 ‘조건 없는 대화’를 지속적으로 촉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계속 거부해 왔다.

전문가들은 바이든 행정부가 언급한 ‘중간 조치’가 비핵화 과정에 기여하고 생산적인 관여 방법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고 지적했다.

데니스 와일더 전 백악관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먼저 "시점의 문제"를 거론했다.

임기가 거의 마무리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새로운 (정책) 아이디어를 제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행정부가 협상하기에 더 낫다’고 여길 수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는 바이든 정부의 ‘중간 조치’ 제안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는 11월 대선 결과를 기다리며 추이를 지켜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과거 북한 고위급 외교 당국자들과 오랫동안 관여했던 에반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북한의 악용 가능성을 제기했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12년 전 북한 외무상과의 뉴욕 회담에서 나눴던 대화를 소개하면서,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단계적 조치에 나설 의지가 없다"며 "오히려 미국의 선의를 악용하려 할 것"으로 전망했다.

당시 미국 대표단이 비핵화의 중요성을 언급하자 북한 외무상은 “미국이 위협을 제거할 때까지 북한은 비핵화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결국 북한이 원하는 것은 대북 협상의 주제를 비핵화에서 군비통제로 바꾸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비어 전 부차관보는 "미국 정부가 ‘단계적 조치’ 등의 접근 방식으로 나아간다면 북한에 나쁜 신호를 줄 수 있으며 그 때가 되면 화두는 더 이상 북한의 핵무기 보유 여부에 대한 대화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무기를 보유해야 하는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테렌스 로리그 미국 해군전쟁대학 교수는 “중간 조치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북한의 핵 역량이나 핵 물질 생산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검증의 어려움’을 지적했다.

로리그 교수는 "과거 모든 비핵화 약속을 어기고 핵 역량을 진전시켜온 북한의 약속을 미국과 한국 측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며, 북한도 사찰을 허용할 의지도 없어 보인다"면서 “난관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과 북한이 ‘중간 조치’, 또는 ‘핵 동결’에 합의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더라도 북한 내 비밀 시설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핵 역량 진전을 검증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한국 정부와 국민들 사이에서는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군축 협상 또는 중간 단계를 고려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거부 정서가 존재한다"면서, "한국에도 ‘배신감 또는 좌절감’을 줄 수 있다"고 관측했다.

로리그 교수는 "이번 ‘중간 조치’ 발언은 한국 정부와도 분명 사전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한국 국민들에게 그 의미와 내용을 설명하려는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또 "미국이 군축론, 또는 중간 단계론을 꺼내는 순간 한국에 미국이 북핵을 용인하려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바이든 정부의 이번 언급이 한국 내에서 다소 잠잠해진 핵무장 여론을 다시 소환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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