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트럼프 행정부의 對아세안 외교는?, 제주평화연구원>

(서정하 제주평화연구원 원장)

지난 4월말 마이크 펜스 부통령의 인도네시아 방문에 이어 5월 4일 워싱턴에서 개최된 미-아세안 외교장관 회담으로 출범 이후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트럼프 행정부의 대아세안 외교에 시동이 걸렸다.1)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4월말 인도네시아 방문 기간 중 아세안 사무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마닐라 개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에 참석할 것이라고 밝힌데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아세안 의장국인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을 비롯한 아세안 회원국 정상들에게 방미초청 의사를 전함으로써 앞으로 미국의 아세안 외교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의 외교안보 전문가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아세안 중시 정책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주로 아래와 같은 점들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트럼프 행정부의 관심사가 아시아 안에서도 동북아에 집중됨으로써 동남아지역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이다. 틸러슨 국무장관과 매티스 국방장관이 트럼프 행정부 출범 초기에 동북아3개국은 각각 방문하면서 동남아지역은 잠시라도 들르지 않은 점이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한다. 둘째, 다자주의를 중시한 오바마 행정부는 EAS와 같은 아세안 주도 다자회의에 적극 참여하였으나 거래(transaction)를 통한 문제해결 방식을 선호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인내심이 요구되는 아세안식 다자적 접근법은 맞지 않을 것으로 보는 점이다. 셋째,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통해 전례가 없을 정도로 아세안 외교에 적극성을 보였으나 오바마 외교정책을 부정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미국의 아시아 회귀 정책이 그대로 유지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 철회는 그런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넷째, 외교안보 이슈로서 남중국해 문제의 민감성이 줄어든 점이다. 중국의 끈질긴 아세안 회유와 중국을 의식한 일부 회원국의 태도 때문에 아세안은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의 충돌을 자제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남중국해 문제를 애매하게 기술한 제30차 아세안 정상회의 의장 성명(4.30)은 이러한 아세안내 입장 변화를 잘 드러냈다.2) 트럼프 행정부도 이 때문인지 지난 4월초 트럼프-시진핑 정상회담 이후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싼 대 중국 공세를 조절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인식은 아세안내 식자층 사이에서도 널리 퍼져 나갔다. 지난 4월 싱가포르 소재 연구기관인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ISEAS)가 아세안 회원국의 정부, 학계, 경제계, 언론, 시민단체 등 300여명의 다양한 분야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트럼프 행정부 출현으로 동남아지역에서 미국의 신뢰가 급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발표에 의하면 여론조사에 응한 54% 이상의 응답자가 미국이 의존할 만한(dependable) 국가가 아니라는 반응을 보였으며 응답자의 3분의 2가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전에 비해 미국에 대한 호감이 줄어들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74%의 응답자가 동남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로 중국을 택하였으며 미국을 선택한 응답자는 3.5%에 불과했다.3) 

  이처럼 미국 신정부의 정책에 불안감과 불신감을 갖고 있는 아세안에 대해 트럼프 행정부는 어떤 정책구상을 갖고 있는 것일까? 우선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아세안 외교 정책 방향이 구체적으로 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시절 보였던 고립주의 성향의 외교안보관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이 통상적인 정책노선으로부터 이탈할 것이란 전망이 컸다. 

그러나 틸러슨 국무장관, 매티스 국방장관,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과 같이 정통적인 현실주의적 국제안보관을 갖고 있는 외교안보 전문가들의 등용으로 미국의 아세안 외교는 중국, 북한, 유럽 등에서 보여준 행보처럼 현실주의 노선으로 변환될 가능성이 많아졌다. 특히 중국과의 불가피한 세력 경쟁, 가치중심 외교의 지양, 북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의 시급성 등이 트럼프 행정부의 아세안 외교에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향후 미국의 아세안 외교 행보에 영향을 미칠 최대 변수는 미·중 간 세력경쟁 추이다. 역사적 경험상 중국에 대한 안보 불안감을 갖고 있는 동남아에서 중국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세력 팽창에 공을 들인 결과 지정학적·지경학적으로 중심적 위치를 점하는데 성공하였다. 남중국해 문제 관련 아세안내 기류 변화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상기 ISEAS 여론 조사가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세력균형의 변화는 미국이 동남아내 전략적 기반을 상실할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으나 현실주의 노선을 따르는 트럼프 행정부에게 동남아 지역의 패권 국가 등장은 수용하기 어려운 선택일 것이다. 

때문에 트럼프 행정부는 동남아에서 미국의 전통적 세력균형 유지 전략을 고수하고 아세안과의 전략적 협력을 계속 중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력 균형자로서 미국의 역할과 동남아지역 최대투자국인 미국과의 경제교류 확대를 바라는 아세안의 지속적인 기대도 트럼프 행정부의 아세안 외교에 순기능을 할 것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의 현실주의 외교는 가치와 이익 사이에서 신축성을 보임으로써 보편적 가치를 중시한 오바마 행정부에 비해 아세안과의 관계 강화에 더 유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오바마 행정부의 가치중심적 외교에 대한 아세안의 반발이 미-아세안 관계의 장애요인이 되기도 했으나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 태국의 프라윳 총리와 같이 비민주적 지도자로 평가받는 동남아국가 정상에게도 방미 초청 의사를 전달한 트럼프 행정부의 아세안 외교는 가치지향적 외교에 구속받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의 한 국제문제전문가는 트럼프의 이러한 아세안 외교를 가치와 이익의 균형을 취하는 “pivot in Asia"이라 부르고 이는 동남아국가들이 원했던 방향이라며 환영하는 견해를 밝혔다.4)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도 미·아세안 관계의 새로운 변수가 될 전망이다. 지난 4월말 미국에서 개최된 미·아세안 외교장관 회담에서 북한 핵·미사일 문제가 매우 비중 있게 다루어진 데서 알 수 있듯이 향후 트럼프 행정부는 북한 핵·미사일 개발 저지를 위한 아세안의 적극적 동참을 계속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5) 국제 정세와 사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전통적으로 일방적인 대북한 비판에 신중함을 보여 온 아세안이 앞으로 북한의 핵·미사일문제 해결을 위해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아세안의 전략적 유용성에 대한 미국의 긍정적 평가에 촉매 역할을 할 것이다. 동시에 역내 안보문제에 대한 아세안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효과도 거둘 것이다. 

 올해는 아세안 창설 50주년이자 미-아세안 관계 4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로서 외교적 성과로 올해를 기념하려는 양측의 공동 노력이 예상된다. 조만간 트럼프 대통령과 아세안 회원국 정상들 간의 정상외교도 활발해질 전망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정책만큼 우리 기억에 남을 트럼프 표 아세안 외교 독트린이 등장할지 지켜볼 때다. 앞으로 미-아세안 관계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미칠 영향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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