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박사(사진=노동신문)
이승기 박사(사진=노동신문)

〔북한의 과학기술〕 [1] '이승기 박사'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명예연구위원>

"남한의 이태규(1902년생),

북한의 이승기(1905년생)" 라는 말이 있다.

두 분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일제시기에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했고, 각각 한국인 최초의 화학박사와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해방후 서울대학교 설립에 참여해 각각 문리대 학장과 공대학장을 역임했고 국립서울대 설립 파동에 좌절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태규 박사님은 1948 년에 도미했고 이론화학자로서 "리-아이링 이론"을 창시해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며, 1973년에 영구귀국해 KAIST 교수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승기박사님은 전쟁 중인 1950년 7월에 이종옥의 초청으로 월북하여 오랫동안 과학원 함흥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자신이 발명한 비날론(PVA) 섬유 공업화에 매진하였다.

이런 공로로 사회주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레닌상을 수상하였다.

핵 개발 참여설 등 이승기 박사님의 생애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와 좌우 대립의 난관 속에서 뜨거운 열정으로 인조섬유 연구에 몰두하였고 세계적인 성과를 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분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북한 과학자와 남한의 제자들에게서 들은 바도 있다. 필자도 고분자화학을 전공했고 북한을 연구하면서 열다섯번 북한을 방문했었다.

이 과정에서 이승기 박사님의 아들을 포함한 수많은 제자들을 만났고 "이승기박사 100주기 학술 세미나"도 공동으로 개최한 바 있다.

과학기술에 초점을 맞추어 이승기 박사님의 생애를 몇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첨부 사진은 담양의 이박사님 생가로 거의 20년 전에 찍은 것이다. 10대 종손이라 집이 크다. 친척이 관리한다고 했다.

이승기박사 담양 생가(사진=이춘근)
이승기박사 담양 생가(사진=이춘근)

가계와 일본 유학...

이승기박사의 생가(1875년경 건축)는 현재 전남민속문화재 제41호인 "창평 장전이씨 고택"이다.

전주이씨 양녕대군 12대손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장전이씨라는 명칭이 붙었다.

부친 이휘로의 세 아들(정기, 승기, 진기) 모두 학자로 대성했으며, 선친 동생(정로)의 손자인 이한기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승기박사는 1921년에 일본 유학에 올랐고, 마쓰야마고등학교를 거쳐 1931년에 교토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하였다.

다만, 당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 모교에 남지 못하고 "고에이사(공영사)"에 들어가 아스팔트 개량을 담당하면서 주 분야인 섬유소 연구에 몰두하였다.

1932년에 그의 연구가 인정을 받아 지도교수인 기따 교수의 추천으로 도쿄공업시험소 연구원이 되었고 이후 3, 4년간 장족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결국 1936년에 교토대학에 일본화학섬유연구소가 설립되면서 정규직 연구강사가 되었고 이후 조교수로 승진하였으며, 1939년에는 "섬유소 유도체 용액의 투전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기회도 찾아왔다.

미국의 캐로더즈가 나일론을 개발해 1938년 뉴욕박람회에 소개하면서 전세계 80%의 견사를 생산하던 일본 업계에 엄청난 위기감이 닥쳤기 때문이었다.

이승기박사의 연구에도 지원이 이루어져 1939년에 폴리비닐알콜(PVA)계 "합성1호"를 발표했으며, 이듬해에는 포르말화로 열수에서의 안정성을 크게 개선한 "합성1호B"를 발표하였다.

이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합성섬유를 개발한 것으로 미국과 경쟁하던 일본이 크게 고무되었다.

이에 1941년부터 "합성1호" 중간시험공장이 건설되고 시험생산에 성공하면서 이승기박사가 책임자가 되었고, 교토대학에서는 정교수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곧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연구방향을 군수로 전환하라는 압박이 가해졌다. 1944년 7월 22일에는 "일본 패전론" 등의 불순 언행을 미끼로 헌병에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이듬해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다.

1945년 12월에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다.

김정일 위원장이 2.8 비날론공장을 시찰하는 모습(사진=노동신문))
김정일 위원장이 2.8 비날론공장을 시찰하는 모습(사진=노동신문))

서울대 교수, 월북...

귀국한 이승기박사는 서울대 창설에 참여하여 화학공학과 학과장을 맡았다.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파동으로 실망해 낙향하기도 했으나, 고향까지 찾아온 제자들의 설득에 복귀하여 10 여명을 졸업시켰고, 제2대 공대 학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에 창설된 조선화학회(현 대한화학회) 부회장도 역임했는데, 이 학회의 초대회장은 이태규 박사였다.

그러나 합성섬유 연구에서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연구설비가 부족했고, 1948년 북한이 대남 송전을 중단하면서, 막대한 전기가 필요한 카바이드 생산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곧 6.25전쟁이 터졌다.

북한은 일제가 남긴 중화학공업을 재건하면서 극심한 과학기술자 부족을 겪고 있었으므로, 체계적으로 학자들의 월북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각종 형식으로 월북(또는 납북)한 이공계 대학졸업자가 약 80명(전체의 40%)이었다.

* 많은 북한 지역 대학교수 등 고급 지식인들의 이력서가 전쟁시기 미군에게 압수되어 워싱턴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승기박사에게는 과학기술총연맹의 이종옥(후에 정무원 총리 역임)이 수차례 찾아와 함흥화학공장 기사장을 제안하면서, 비날론연구소 설립과 공업화를 약속했다고 한다.

함흥 지역에는 일제시기 노구치 재벌이 구축한 대규모 석탄화학 기지가 있었고, 인근에 대형 탄전과 수력발전소가 있었다.

비날론 원료인 카바이드 공장도 상당히 큰 것이 있었으므로, 세계에서 2번째로 개발한 비날론의 공업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었다.

*일제시기 흥남비료공장의 전기분해 설비는 세계 1위, 카바이드 생산은 일본 1위였다.

북한에서 출판된 이승기박사의 자서전 "어느 과학자의 수기"에는 즉시 월북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제자인 국순웅 교수에 의하면 적지 않게 망설였던 것 같다.

이승기 박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몇몇 제자들이 "선생님 염려마십시요. 저희들이 함께 가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고 했다 한다.

결국 7월 31일에 10 여명의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필자가 이 때 동행했던 제자 국순웅교수와 몇 차례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평양에서 조사를 받을 때 담당자들이 "이놈들, 몽땅 부르조아 아냐? " 하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렸다 한다.

결국 국순웅이 다시 남하했고 후에 고려대 화학과 교수가 되어 국내 고분자화학 기초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국순웅교수는 필자에게 "이승기 박사님께서 '자네는 다시 돌아가게!' 라고 하셨다."는 말을 전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어떤 방법으로 돌아왔는지는 듣지 못했다. 2015년에 작고하셨다.

이승기 박사가 함흥에 배치되었으나, 첫 출발부터 고난이 시작되었다.

도착 3일만에 미군의 대규모 폭격으로 공장이 대파되고, 10월 1일에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필자가 몇 번 만났던 이승기박사의 장남 이종과 교수(김일성종합대 촉매연구실장)에 의하면, 김일성이 전쟁 중에 소달구지를 보내 가족들이 이사토록 했다 한다.

이박사는 1950년에 태어난 막내를 포함해 3남5녀의 대가족을 거느리고 있었다.

일행은 평안북도 삭주군의 압록강변에 있는 청수화학공장으로 이전하였다.

이 공장은 일제가 1943년에 준공했는데, 석회질소비료를 생산하면서 대형 카바이드 생산설비를 갖추어, 비날론 연구에 적합하였다.

곧 100여명의 인력들이 지원되어, 전쟁 중에도 비날론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승기 박사 기념 우표(사진=조선우표사)
이승기 박사 기념 우표(사진=조선우표사)

비날론 공업화...

이승기 박사는 곧 북한을 대표하는 과학자가 되었다.

1952년 4월 모란봉대극장에서 개최된 전국과학자대회에 초청되었고 동년 12월에 창립된 북한과학원의 원사이자 자연.기술과학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노력훈장을 받고 과학원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1957년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고 2년 후에는 제1회 인민상을 받았다.

북한이 전쟁 중에 100명이 채 안 되는 과학기술자들을 총 집결해 과학원을 만든 것은 상당히 주목할만 하다.

우리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ICT 등으로 순차 발전한데 비해 북한은 건국 초기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면서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활용했기 때문이다.

참전 중인 이공계 대학생들을 학교로 복귀시키고 이 중 상당수를 소련, 중국 등에 유학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전후 복구 3년이 끝나고 "제1차 경제발전 5개년계획(1957~)"이 수립되면서 비날론의 공업화가 국가 과제로 추진되었다.

북한은 농지 면적이 적으므로 면화나 양모 등의 천연섬유 대신 합성섬유에 주목하였고, 석유 대신 석탄이 풍부하므로 처음부터 비날론에 주목하였다.

이승기 박사가 1956년에 청수에 일산 200kg의 중간시험공장을 완성했는데, 그의 발명을 계승한 일본은 1957년에 연산 25,000톤 공장을 가동하고 있었다.

* 일반적으로 폴리비닐알콜계 섬유를 비닐론이라 칭하는데, 북한은 김일성이 우리 말의 씨실과 날실을 차용해 비날론이라 명명하였다.

1959년 3월에 김일성의 시찰을 통해 일제시기 화학공업의 본거지였던 함경남도 본궁에 "2.8비날론" 공장 부지를 확정하였다.

곧 전국의 화학분야 연구소들을 통합해 함흥에 과학원 함흥분원을 설립(1960)하고 이승기박사가 초대 원장이 되었다.

건설은 노동자와 군인들이 동원되어 소위 "비날론 속도"라는 말을 만들면서 급속히 진행되었고 1961년 5월 6일에 연산 2만톤의 공장이 준공되었다.

이 때 김일성이 이박사의 손을 잡고 "이것으로 선생의 평생 숙원이 이루어졌습니다."고 말했다 한다.

이승기박사의 명성도 사회주의 국가들로 확대되었다.

북한에서 노력영웅이 되었고 소련의 레닌상(1962)과 과학원 명예원사(1966)를 획득하였다.

중국의 비날론공장에 대한 기술지도도 하였다. 여기에 소설 같은 얘기가 전해진다.

중국이 공장을 건설하고 아무리 해도 정상가동이 안 되어 이승기박사를 초청했다고 한다.

이박사가 둘러보고 이유 없이 "저 반응탑 각도를 이렇게 조정하시오."라 했고 조정하니 실제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필자가 수차례 만났던 당시의 중국측 통역이 이승기박사의 비날론 책을 중국어로 번역 출판하기도 했다.

이 때가 이박사의 전성기로 보인다.

북한이 섬유생산을 확대하려 했으나 엄청난 전력이 소요되는 비날론을 확장하는데 어려움이 컸다.

70~80년대 북한의 화학섬유 확장이 인견(비스코스 레이온)과 아닐론에 집중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박사의 비날론에 대한 마지막 열정은 1980년대 말의 사회주의체제 혼란 시기에 국운을 걸고 추진한 순천비날론공장 건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공장은 당시에 파이로트공장 규모로 연구하던 "산소열법에 의한 카바이드 생산"을 바로 대규모 공장에 적용해 상당한 기술적 위험부담을 안고 있었다.

평생을 화학공학자로 살아온 이박사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들은 말로는 당시 김일성이 이박사에게 "생애의 마지막 봉사로 이 공장을 건설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순천비날론공장은 1989년 10월 9일에 연산 5만톤 규모의 제1기 공사를 완료했으나, 산소열법에 의한 카바이드 생산이 실패하면서 문제에 직면하였다.

결국 과거로 돌아가, 재일동포들의 지원으로 1995년에 전기로에 의한 카바이드 생산설비를 도입했으나, 고난의 행군과 전력난으로 가동이 중단되고, 공장이 황폐화하고 말았다.

2.8비날론공장도 이 시기에 가동이 중단되었다가, 김정일의 지시로 재건되어 2010년에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다만 비날론이 의복에 적합하지 않고 경제성이 취약하다는 문제가 여전하다.

일찌기 월북 과학자인 여경구박사가 이를 지적하다 고난을 받기도 하였다. 앞으로도 정상가동과 생산 확대는 어려울 것이다.

비날론 원료(사진=노동신문)
비날론 원료(사진=노동신문)

비날론의 특성과 의의..

비날론은 우리 과학자가 세계에서 두번째로 개발한 합성섬유로써, 식민지 시대의 일본과 냉전시기의 사회주의국가들에서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보여 준 커다란 과학기술 성과였다.

다만, 석탄에서 출발해 대량생산이 어려웠고, 폴리에스터 등의 후에 개발된 합성섬유에 비해 경제성과 응용성이 떨어져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이를 정리해 보자.

1) 제조 공정...

초기에는 석회석과 무연탄을 전기로에서 처리해 카바이드를 만든 후, 이를 물과 반응시켜 아세틸렌을 만들었다.

현대 공법에서는 석유나 천연가스의 크래킹으로 만들므로 전력이 크게 절약된다.

이후의 공정을 첨부 1의 2.8비날론공장 생산공정도에 표시하였다.

2) 비날론의 특성...

비날론은 면과 유사하고 질기며, 산과 알카리, 열, 곰팡이, 염분에 잘 견디고, 고무, 시멘트와의 접착성과 보온성이 우수하다.

다만, 흡습성이 높고 치수가 불안정하며, 탄성희복율이 낮고 염색이 잘 안 된다.

따라서 산업용으로, 공업, 수산, 토목건축, 종이, 고무 보강 등에 많이 쓰인다.

의류용으로는 타 섬유와 혼방해, 작업복과 특수복에 주로 사용한다.

3) 경제성...

비날론의 가장 큰 약점은 검화와 습식방사, 열처리와 아세탈화 등의 공정으로 인해, 생산 원가가 높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처럼 석탄을 사용해 카바이드와 아세틸렌을 만들면 석유화학에 비해 PVA 제조원가가 거의 2배 가까이 오를 수 있다.

비날론이 상당히 일찍 개발되었음에도 전세계 생산량이 적은 이유이다.

4) 과제...

북한에서는 석탄가스화를 통해 카바이드를 거치지 않고 초산을 만들어, 전기를 대폭 절약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와 함께 PVA 중합도를 높여, 고가의 특수소재를 만드는 방법도 연구한다.

5) 전망...

비날론 중간체는 전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특수 소재가 될 수 있다.

일례로 국내에서는 PVA로 정수용 중공사필터 등의 첨단소재를 개발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페인트와 가소제 등의 곁가지 제품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이고 있다.

PVA 중간체는 상당히 다양한 응용이 가능하고 개발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이런 제품들은 일상생활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북한의 개혁개방 정도에 따라, 남북협력이나 세계시장 진출의 유망 품목이 될 수도 있다.

애국열사릉에 있는 이승기 박사 묘소(사진=노동신문)
애국열사릉에 있는 이승기 박사 묘소(사진=노동신문)

가계와 제자들, 그리고 핵개발 참여 의혹...

1) 가계...

중국의 첸쉐썬과 달리, 이승기박사님은 상당히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고, 제자들과의 인간관계도 좋았던 것 같다.

이박사의 자서전에도, 근처에 사는 아들딸 손주들, 찾아 온 제자들과 어울리는 글이 자주 나온다.

부인은 황의분 여사인데, 2000년 이산가족 상봉때 84세의 최고령으로 서울에 와 조카를 만나기도 하였다.

3남5녀의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사위와 며느리들까지 대부분 화학을 전공해 30 여명의 교수, 박사, 학사 가문을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첫 사위 이재업박사는 과학원 함흥분원 화학공학연구소장을 지냈고, 원사와 노력영웅 칭호를 받으며, 가문의 학풍을 잘 이끌었다.

넷째인 장남 이종과 교수는 김일성종합대학 촉매연구소장으로 제올라이트 촉매 등을 개발해 공훈과학자 칭호를 받았다.

2) 핵개발 참여?

이승기 박사의 핵개발 참여설에는 많은 논란이 있다.

참여설의 가장 큰 근거는 남파공작원 김진계의 "강계행 열차에서 인민군 소장계급을 붙인 이박사를 만났는데 강계의 원자력연구소에 간다고 했다."는 진술이다.

다른 것들은 통일원과 원자력연구소 등의 보고서 일부와 언론 기사들인데, "이박사가 1960년대에 영변 핵무기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아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것들 만으로는 이박사가 핵개발에 참여했다고 확정 짓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남파 공작원인 김진계의 진술 외에는 구체적인 근거 제시가 없고, 연구소 명칭과 시기, 역할이 사실과 다르거나, 자료간에 일치하지 않는다.

강계에 원자력연구소가 있나?

영변 단지(분강 지구)와 원자력연구소를 혼동하거나, 초대 소장에 다른 사람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박사의 전공과 연령, 비날론 공업화 일정을 보면, 핵개발을 주도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관리자 역할을 맡겼다는 설도 있는데, 공산주의에 투철하지 않은 타 전공 지식인에게, 국가 최고 비밀 업무를 맡긴다는게 잘 이해되지 않는다.

미국, 소련, 중국의 경우를 보면, 총책임자는 군인이나 정보기관의 핵심 인물이고 기술 책임자도 핵물리 전공이면서 인접분야를 아우룰 수 있는 사람이 임명된다.

화학공정인 사용후핵연료 재처리 분야라면 가능하겠으나, 영변 5MW 원자로가 1986년에 정상운영을 시작했고 1989년 11월에야 3개월간 정지해 연료봉 인출 의혹이 있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때는 이박사가 80대 후반이고, 순천비날론공장 건설에 매진하고 있을 때였다.

핵개발 관련자는 외부세계와 철저히 차단되는데, 이박사는 계속 과학원 함흥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재일동포 등의 외부인을 만났고,비날론 연구논문도 계속 투고하였다.

그렇다고 필자의 생각이 모두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북한 연구자들이 좀 더 근거있는 자료들을 구하면서, 체계적으로 파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3) 제자들과 회고..

남북한 모두에 이승기박사를 따르는 제자들이 상당히 많다.

일제시기에도, 다섯 아이를 키우면서 많은 후학들을 대접했다고 한다.

교토대학 후배인 염성근박사는 1961년에 재일동포 북송으로 이박사를 찾아가 함께 비날론 공업화에 일생을 바치기도 하였다.

서울대 교수 시절에도, 고향집에 찾아온 제자들을 따뜻히 챙겼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고려대 국순웅 교수님의 회고에서 보는 것처럼, 10여명의 제자들이 함께 월북한 것이, 오직 사상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박사는 1996년 2월8일에 서거해 애국열사능에 안장되었다.

제자인 마경석 박사님은 서울대 동창회보에 존경하는 두 은사로 이태규박사와 이승기박사를 소개하고, 2001년에 남북 공동 추모행사 개최를 제안하기도 하였다.(첨부 1)

이런 뜻을 이어, 필자는 당국의 허락을 받아, 2005년에 북경에서, 우리 화학연구소와 북한 과학원 함흥분원, 재일동포 과학자들과 함께, "이승기 박사 100주기 학술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자리에 이박사의 장남인 이종과 교수가 참가하였다.

이 교수님은 당시 홀로계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였다. 필자가 담양 이박사 생가(시댁)의 사진을 몇장 구해 드렸는데 어머님께서 고향을 아주 그리워 하신다고 하면서,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승기박사님은 분단된 조국의 현실만으로, 단번에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비날론(PVA 섬유)은 한국 과학기술의 보기 드문 세계적 업적으로, 일제와 사회주의 국가들에 우리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준 역사적 유산이다.

핵 등의 잘 모르는 분야는, 알 때까지 판단을 보류했으면 한다.

우리 모 방송국(K 본부?)에서 오래 전에 이박사 일대기를 다큐로 제작했다가 방송을 보류했다고 한다.

유품도 제법 수집했다 하는데, 이런 것을 모아, 작은 전시실이라도 만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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