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러시아 대외정책 전망: 대미, 대한반도 정책을 중심으로, 남북물류포럼>

(제성훈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 교수)

지난 3월 1일 크렘린궁 인근에 위치한 마네쥐(Manege)홀에서 푸틴 대통령은 자신의 열네 번째 연례교서를 발표했다. 오는 3월 18일에 치러질 대통령선거에서 푸틴 대통령의 4선이 확실시되기 때문에 이번에 발표된 연례교서는 사실상 차기 정부, 다시 말해 4기 푸틴 정부의 청사진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먼저 복지·삶의 질 제고, 도시·지역개발, 주택, 교통·통신 인프라, 의료·보건체계, 환경, 문화·교육, 과학기술 혁신, 재정 확보, 비즈니스 환경 개선 등 다양한 국내문제를 언급하고 나서, 러시아가 개발한 최신무기체계를 이례적으로 영상까지 활용하여 소개하는데 상당히 긴 시간(약 45분)을 할애했다. 이 과정에서 이러한 최신무기체계가 미국의 군사력에 맞서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2002년 미국의 일방적인 탄도요격미사일제한조약(ABM 조약) 탈퇴 이후 지난 15년간 계속된 글로벌 MD 체계 구축으로 인해 이를 극복하는 첨단전략무기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3기 푸틴 정부 시기(2012~18)를 거치면서 미·러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현재 미·러 관계의 악화는 시리아 내전, 우크라이나 위기 등과 함께 국제안보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으며,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진전과 맞물려 한반도 정세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에서는 3월 18일 대선 이후 러시아의 대외정책을 대미, 대한반도 정책에 한정하여 전망해보고자 한다. 

미국과의 ‘제한적 협력관계’ 설정

  2012년 3기 푸틴 정부 출범 이후 계속 심화되던 미·러 갈등은 지난해 미국의 대러 제재 확대와 ‘제재의 법제화’로 인해 사실상 ‘신냉전’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미국과 러시아는 이미 2012년 상대국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며 각각 ‘마그니츠키 법’과 ‘디마 야코블레프 법’을 제정하여 제재명단에 인사들을 추가해왔고, 2014년부터는 ‘우크라이나 위기’와 관련한 상호 경제제재를 계속해왔는데, 최근에는 외교, 군사 분야까지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 

2016년 말 미국이 자국 대선 개입을 이유로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고 외교공관 2곳을 폐쇄하자, 2017년 7월 러시아도 자국 주재 미국 외교관 및 기술직 직원 수 감축을 요구하고, 8월에는 미국 대사관이 사용하던 창고와 별장 사용을 중단시켰다. 이에 맞서 다시 미국은 8월 23일부터 러시아 전역에서 비이민 비자 발급을 중단하고 9월 1일부터 대사관에서만 이를 재개했으며, 샌프란시스코 주재 러시아 총영사관과 워싱턴 및 뉴욕 소재 무역대표부 건물 2곳을 폐쇄했다. 

또한, 2017년 3월 셀바 미국 합동참모차장이 러시아가 지상발사형 순항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중거리핵전력협정(INF)을 위반했다고 주장하자, 러시아는 이를 부인하고 오히려 미국이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토마호크 미사일 발사 시설을 배치하면서 해당 조약이 금지한 순항미사일 개발 착수 의지를 보인다며 비난했다. 더 나아가 11월에는 클린체비치 러시아 상원 국방안보위원회 제1부위원장은 MD 배치 등 미국과 NATO의 비우호적 조치들에 맞서기 위해 쿠바 군사기지를 부활하자고 주장했다.

  양국의 갈등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은 미국 의회에 의한 ‘제재의 법제화’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7년 7월 미국 의회가 러시아 석유·가스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 제한, 사이버 공격, 부패, 인권 탄압 관련 인사에 대한 제재 등을 가능하게 하는 ‘제재를 통한 미국의 적 대응법(Countering America’s Adversaries Through Sanctions)’을 통과시키면서 약 40개 러시아 방위산업체와 정부기관이 제재대상으로 지정되었는데, 사실 이 법의 가장 큰 독소조항은 대통령이 의회의 허가 없이 대러 제재를 해제할 수 없게 만든 데에 있다. 따라서 이 법은 향후 양국 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법적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이처럼 적어도 트럼프 정부 임기 내에 양국 관계 개선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신냉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신냉전’은 냉전 시절처럼 이념적 대립의 수준에서 전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지정학적 구상의 대립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냉전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러시아는, 얄타 체제의 산물이자 냉전 시절 형성된 글로벌 안보 레짐은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몰타 체제의 산물이자 탈냉전의 결과로 형성된 미국의 패권에 더는 순응하려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몰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모스크바의 전략가들과 얄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워싱턴의 전략가들 간 서로 다른 지정학적 구상의 대립이자 투쟁이 미·러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는 것이다.

  연례교서를 발표하면서 푸틴 대통령은 첨단전략무기 개발 성과를 과시하는 동시에,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혁신적이고 유망한 국제안보체계”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언급했다. 모스크바의 전략가들은 과거 냉전시절과 마찬가지로 주요 국제문제를 관리하고 국제안보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과의 상호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푸틴 대통령이 계속 권좌에 앉아있는 한 트럼프 정부가 대러 관계를 전면적으로 개선할 명분을 찾기 어렵다는 데 있다. 따라서 대선 이후 러시아의 대미 정책은 국제안보와 관련하여 미국과 ‘제한적 협력관계’를 설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북한 체제에 대한 안전보장 공약과 남·북·러 3자 경제협력 추진

  지난해 북한의 핵·미사일 시험으로 인한 한반도 위기상황에서 러시아는 다음과 같은 입장을 유지했다. 첫째, 핵보유국 지위를 획득하려는 북한의 열망은 글로벌 비확산 레짐을 침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수용·승인될 수 없고, 따라서 이를 저지하려는 유엔의 대북제재에 찬성한다. 

둘째, 대북 협상의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이지만, 북한에 대한 ‘극심한 압력’은 인도적 재난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셋째, 북한과 미국, 그리고 유관국들은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조치를 자제하면서 협상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러시아는 한반도 위기 해결을 위한 중재자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UN 안보리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북한에 대한 ‘과도한 제재’를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중국과 함께 한반도 위기의 단계적 해결방안을 담은 ‘중·러 로드맵’을 마련하여 북한과 미국 간 입장 조율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난해 12월 페스코프 대통령 공보비서는 러시아는 기꺼이 미국과 북한 간 중재자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양측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러시아는 적어도 1990년대 중반부터 동북아, 특히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했기 때문에, 한반도 위기와 관련하여 중국과 보조를 맞추면서도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가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러시아는 북한, 미국 측과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는 첫째,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진전시켜 명실상부한 핵보유국이 되면서 냉전 시절에 형성된 글로벌 안보 레짐이 침식되고 있고, 둘째, 한국 영토 내 사드 배치가 미국의 글로벌 MD 체계 구축 차원에서 확고해진다면 이는 냉전 시절처럼 미국의 대러 포위 전략이 본격화되는 것을 의미하며, 셋째, ‘신냉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한반도 위기가 시리아 내전과 함께 러시아가 미국과 협의 채널을 계속 가동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국제문제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 개선의 전기(轉機)가 마련되고, 이어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합의되면서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에도 변화가 불가피해 보인다. 북미 간에 한반도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질 경우, 북한 핵·미사일 프로그램 진전이 야기한 글로벌 비확산 레짐 침식이 중단되고, 한국 영토 내 사드 배치도 명분을 상실하게 될 것인데, 이는 러시아의 전략적 이익에 정확히 부합한다. 

더불어 러시아는 극동·시베리아 개발에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한반도에서 자국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는 남·북·러 3자 경제협력 실현을 위한 기반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 러시아는 첫째, UN 안보리에서 대북제재 완화 또는 철회를 주도하면서 향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시 북한체제에 대한 안전보장 제공을 공약하고, 둘째, 한반도 위기 해소를 불가역적으로 만들려는 목적에서 남·북·러 3자 경제협력 추진을 가속화할 것이다. 반대로 북미 간에 합의 도출이 실패할 경우, 러시아는 중국, 한국과 긴밀히 협조하면서 북한과 미국의 입장 조율을 위한 중재자로 다시 나서게 될 것이다.

‘한반도의 봄’과 ‘신북방정책’

  201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3차 동방경제포럼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러시아를 비롯한 탈소비에트 국가들과의 협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의 ‘신북방정책’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미·러 갈등으로 인한 미국의 대러 경제제재와 북한의 핵·미사일 프로그램 진전으로 인한 한반도 위기는 ‘신북방정책’ 수행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었다. 

물론 미·러 갈등은 조기에 해결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지만,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 개최 합의는 ‘신북방정책’의 실질적 성과와 한·러 경제협력 확대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고 있다. 일촉즉발의 전쟁위기에서 극적으로 찾아온 ‘한반도의 봄’이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위기가 아닌 새로운 희망으로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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