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부 중견국 외교를 위한 제언, 제주평화연구원>

(손열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지난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책임 있는 중견국 외교 등 다양하고 화려한 구호를 내걸었으나 결과는 초라했다. 북핵 문제를 풀기위한 미‧중 양대국과의 외교, 역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줄다리기에 몰두하여 남북관계 개선, 지역협력의 주도권 확보, 글로벌 다자외교 활성화 등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하였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대통령과 외교수장은 글로벌 무대나 지역 무대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지만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이들 무대는 국가 간 집합적 이익(지역의 평화와 번영 등)을 규정하고 질서를 조성, 관리하는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무대 주변에서 자국의 문제(북핵)를 해당국과 논의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강대국처럼 확장된 국익 개념을 바탕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약소국처럼 협소하게 규정된 국익 개념 하에 활동하는 것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은 이미 덩치가 많이 커졌고 우리에 대한 타국의 기대나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한국은 북핵과 북한 문제라는 숙명적인 외교적 숙제를 안고 있어 그 해법에 주력하는 것은 타당하나 이제 한국의 국가 이익은 커진 덩치만큼이나 다면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외교를 펼쳐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일군의 전문가들은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1) 한국은 국익 실현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할 강제력이나 유인력을 가진 강대국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국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따라서 타국의 눈치를 보며 목전의 이익에 몰두하는 약소국도 아니다. 

중견국 외교란 ➀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시점에서 국익을 계산하고, ➁ 물리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지식과 매력, 외교술 등 소프트파워 자원을 동원하며, ➂ 강대국 사이 혹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중견국의 위치적 이점(positional advantage)을 십분 활용하는 네트워크 외교를 수행하고, ➃ 국제규범 제정에 역점을 두어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조성, 운영하는 외교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중견국 외교는 지난 정부의 구호 중 계속 살려나가야 할, 몇 안 되는 전략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장에서 중견국의 지위는 상승하고 있다. 21세기 국제질서는 국가 간 물리적 힘의 균형뿐만 아니라 무엇이 정당하고 소망스러운 질서인지를 규정하고 타국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는 규범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의 물리적 강제력이나 유인력만으로는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되지 않는다. 

아태지역의 경우,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지역 질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가운데, 역내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낼 만한 콘텐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견국의 기회구조가 열리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아태지역 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공재를 제공해 왔으나, 트럼프 행정부 들면서 “미국 우선주의” 구호 하에 자국의 이익만을 좇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태지역에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조성하는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자국의 비대칭적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양자주의 거래로 전환하는 한편, 안보에 있어서는 기존의 동맹 네트워크를 거래중심적으로 운용하여 동맹국의 근심을 사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 원칙 하에서 아태지역 질서를 어떻게 수정해 갈 지에 대한 방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미국의 위신(prestige)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미국이 자초하고 있는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미국의 경제민족주의에 대항하여 경제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기수를 자임하고, 친성혜용(親‧誠‧惠‧容), 신형주변국관계, 운명공동체 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대안적 지역 질서를 모색해 왔지만, 사드(THAAD)배치 문제나 남중국해 사례에서 보듯이 지역의 집합적 이익보다는 자국의 핵심이익을 추구하는 데에서 한 발짝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완강함을 보이며 주변국을 불안케 하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는 물리력에 상응하는 위신, 즉 지역 질서를 주도할 만한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지역 질서가 강대국 정치 논리, 즉 강대국 간 세력 각축과 균형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중견국과 약소국의 이해를 담는, 보다 다원적이고 탄력적이며 거버넌스적인 질서로 변환하도록 중추적 중견국으로서 역할을 부과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 2010년대 들면서 한국은 미‧중 패권경쟁의 단층선에 위치한 관계로 여러 난처한 상황을 겪어 왔다. 미국이 주도한 TPP 교섭에 중국의 반발로 참여를 주저한 측면이 있고, 중국이 주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는 경제적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부정적으로 나옴에 따라 참가를 주저하다 출범 직전 막차를 탄 바 있다. 사드배치 문제의 경우, 미중경쟁 구도 속에서 주체적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양자택일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눈치 보기와 단기대응을 넘어서 국제규범과 원칙에 근거해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AIIB, TPP, 사드 문제는 일차적으로 한미‧한중 관계 역학을 고려하되 개방성, 투명성, 다자주의 가치를 준거(準據)로 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원칙론, 명분론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국제규범과 규칙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조성하여 주요 외교 사안들이 미중의 패권 경쟁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국제협력, 다자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정체성을 만들어 가야 한다.

  비근한 예로 아태지역 주요국들이 견지해 온 “정경분리원칙”을 들 수 있다. 정치적, 안보적 이유로 상대국에 경제적 보복을 하지 않는 국제규범으로서 중국은 그 최대 수혜자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중국은 센카쿠(다오위다오) 분쟁이나 사드배치 논쟁처럼 안보 이슈로 관리무역을 통한 보복운동을 전개해 왔다. 

정경분리원칙을 제창해 온 일본도 최근 부산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보복으로 양국 간 통화스와프 논의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미국 역시 중국의 북한 압박을 추동하기 위해 중국에 무역보복 위협을 가하고 있다. 

강대국이 안보이익 실현을 위해 경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외교행태는 아태지역의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위협하여 경제적 압박 수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역내 중견국 및 약소국의 안정과 번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이 정경분리원칙 준수를 위한 중견국 간 협력외교, 규범외교를 주도할 필요와 기회가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외교층위를 확대하여 국익을 추구하려는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다자 무대에서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외교성향을 띠고 있다. 당면한 북핵 위기를 극복하려는 단기적 노력과 함께 자유주의 지역 질서를 설계하고 건축하는 장기적 노력을 병행할 때 한국의 국익이 확보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중견국 외교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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