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LOFO 칼럼 제456호

물류 격변기, 일본의 선택

최재선 남북물류포럼 수석부회장

물류시장이 말이 아니다. 어떤 분은 물류 빙하기라고 말하고, 일부 전문가들은 판이 바뀌는 전조 증상으로 진단한다. 조짐은 오래 전부터 목격됐다. 해운시장이 상승 랠리를 끝내던 2008년 부터 현장에서는 여러 가지 파열음이 들렸다. 세계 최대 해운회사 머스크라인이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초대형 선박을 대량 발주하고 나섰다. 시장 전문가들은 선사 경영전략의 하나로 판단했다. 예측이 빗나갔다. 2위, 3위 해운회사들이 뒤질세라 선박 발주 대열에 합류했다. 선박 과잉 공급이라는 폭탄이 물류시장에 투하됐다. 글로벌 시장에는 배가 넘쳐났고, 해상운임은 크게 떨어졌다. 선사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팍팍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세계 경제는 더 먼저 침체국면에 빠져들었다.

돈이 메말랐던 국내 선사들은 배를 새로 만들기 보다는 비싼 값에 배를 빌리는 방법을 택했다. 배만 있으면 시장에서 살아남는다는 전통적인 선사 경영전략에 따른 행보였다. 그리스 해운회사들은 시황이 나쁠 때 배를 싸게 확보한다. 호황기가 오면 배를 비싸게 대선해주는 방법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 우리나라 선사들은 경기가 한참 좋을 때 비싸게 용선했다. 이 같은 전략은 그 후 용선비 앙등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국내 2대 해운 회사가 일시에 침몰한 직접적인 원인이다. 대마불사를 너무 고집한 탓이었을까? 해운 빅브라더 한진해운의 파산은 국영선사 현대상선을 낳았다. 그리고 우리 해운산업의 앞날은 다시 암울해졌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판세를 잘못 읽은 탓도 있다. 2010년 스마트 폰 등장 이후 글로벌 산업 생태계는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다. 세계가 모바일 경제 시대로 접어들면서 일상생활은 물론 상품의 제조와 유통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판을 장악한 플랫폼 기업이 대형화주로 등장하면서 화물을 나르는 해운회사는 단순한 운송업자로 전락할 처지에 빠졌다. 서적 백화점이었던 아마존이 세계의 모든 상품을 판매하면서 물류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유통 강자로 나설지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아마존은 물류시스템을 갖추고, 직접 플레이어로 등장했다. 광군제 행사로 대박을 친 중국의 알리바바는 또 어떤가? 자체 플랫폼을 통해 화물운송 서비스에 나선데 이어 「차이냐오」라는 물류회사까지 만들어 글로벌 물류 시장에 진입했다. 이제 물류시장은 기존 문법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이 같은 물류 격변기에 일본은 차별화된 생존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른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3대 선사를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일본 우선(NYK)과 K-라인, 미쓰이 상선(MOL)은 일제 때부터 일본이 자랑하던 해운회사다. 일본 해운의 상징이었을 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존재감이 매우 컸다. 해운경기 불황이라는 쓰나미가 밀려오자, 3대 회사는 컨테이너 화물은 나르는 정기선 서비스 부문을 통합해 오션 네트워크 익스프레스(ONE)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 냈다. 세계 해운사에서 3개 회사를 합쳐 1개 회사로 거듭난 사례는 아마 일본이 처음일 것이다. 유럽 선사가 정부 보조금으로, 그리고 중국의 경우, 코스코와 차이나 쉬핑이 강제 통합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정부 지원이나 개입 없이 민간기업 스스로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는 방법을 택한 셈이다.

일본 통운(일통)의 대응도 눈여겨 볼만하다. 일통은 1937년에 국영물류기업으로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 특수를 거치면서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이 같은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2008년 이후 세계경제의 불황이 장기화 되자 과감한 구조 개혁을 통해 새로운 변신을 시도했다. 최근 들어 경쟁이 치열해지는 일본 택배시장에서 철수하거나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서비스는 모두 접었다. 대신 초중량 화물 운송과 설치라는 새로운 비즈니스를 선택했다. 회사 중장비 건설 부문에서 취급하던 특수화물 운송사업 부문을 개편, 화물 운송뿐만 아니라 새로 길을 만들어 그 화물을 설치하는 비즈니스까지 사업 범위를 넓혔다. 최근에 시장이 크게 확대되고 있는 풍력발전기 부문이나 해외 정유공장 플랜트 운송과 설치까지,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특수 사업에서 미래 성장 동력을 찾았다. 지식 컨텐츠 스타트 업 퍼블리는 일통의 이 전략을 불특정다수를 겨냥한 힘겨운 등산 전략이 아니라, 자체 노하우를 바탕으로 특정 고객에게만 특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산 전략으로 풀이했다. 일통은 기업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곁가지를 잘라내는 도전에 성공했다. 기업 이미지 변신을 물론 레드 오션에서 벗어나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한 모델을 만든 전형적인 사례다.

편의점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생활물류 시장에서도 일본의 선택은 남달랐다. 우리나라의 편의점수는 2018년 기준으로 4만개가 넘는다. 편의점이 과포화상태라는 경고음이 계속 울리는데도 해마다 점포 수는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편의점의 원조인 일본의 사정 역시 우리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편의점이 처한 문제를 푸는 해법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처방전을 썼다. 업체의 출점 경쟁을 줄이고, 점포 면적을 대형화 했다. 이렇게 되자 점포에 진열하는 상품 수가 5,000종으로 늘어났다. 넓은 매장과 다양한 상품 구성 등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좋아졌다. 최근에는 본사 직영 매장을 늘리고, 점주의 운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위탁 가맹을 확대하는 추세다. 본사도 살고, 점주도 같이 사는 상생협력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이제 물류 빙하기를 지나면 물류 빅뱅시대가 다가온다. 업종 간 구분이 없어지고, 이업종이 본 업종을 밀어나는 시대가 도래한다. 매장 없이 영업하는 쿠팡이 뜨고, 샛별 배송이라는 신 개념 유통을 만들어낸 마켓 컬리가 각광을 받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는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처절한 혁신만이 기업의 100년 성장을 보장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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