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푸틴 정상회담 가능성과 정책적 시사점

장세호 국가안보전략연구원

2.28 하노이 선언 채택 불발과 북미 양국의 대응

한반도 비핵화·평화 프로세스의 진전에 중요한 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됐던 2.28 제2 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결국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은 합의문 채택에 실패했다. 이처럼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빅 이벤트’가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종료됨에 따라 기존의 막연한 기대감이 실망과 우려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다.

하노이 정상회담의 결렬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낙관론과 비관론으로 나뉜다. 낙관론은 대체로 북미가 합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상호 간 요구사항을 정상 차원에서 명확히 확인하는 등 성과가 없지 않았고, 양측의 대화 지속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반대로 비관론은 이번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미 양측의 요구사항 간 괴리가 심대하고, 이른바 ‘톱다운’식 접근마저 성과를 도출하지 못함에 따라 북미 대화 동력이 크게 감소할 것으로 예상한다. 아마 현실은 이러한 낙관론과 비관론 사이의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실제로 향후 수개월이 낙관론과 비관론 사이의 적실성이 결정되는, 다시 말해서 북미 비핵화 회담의 성패가 좌우되는 엄중한 시기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를 보여주듯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미국과 북한은 모두 이중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먼저, 미국은 ‘빅딜’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면서도 대화 모멘텀 유지에 성의를 보이는 이중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미국은 존 볼턴과 같은 강경파의 입을 빌려 하노이에서 ‘스몰딜’의 불수용(不受容)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향후 대북 제재의 확대 가능성을 재차 언급함으로써 북한에 적극적 비핵화 행보를 압박하고 있다. 다른 한편, 한국 정부에 대한 적극적 중재 요청, 기존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축소·조정 발표,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수주 내 협상단 평양 파견 의지 표현 등 유화적 조처를 병행하고 있다. 북한 역시 마찬가지다. 북한은 현재 작년 7월 일부 시설을 철거하며 완전 폐기를 시사했던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을 최근 신속하게 복구함으로써 신년사에서 언급한 소위 ‘새로운 길’의 선택에 대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김정은의 하노이 방문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김정은이 연이은 당 행사에서 경제발전의 절박성을 강조하는 등 후속 대화를 염두에 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북러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의 확대와 구조적 요인 

이런 가운데 최근 북러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필자 역시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이후 조성된 구조적 현실이 북한으로 하여금 현시기 자국의 최우선 정상외교 대상으로 러시아를 선택할 가능성을 크게 확장했다고 판단한다.

현재 북한의 가장 큰 우려는 미국의 비핵화 문제에 대한 접근법 변경이다. 핵심은 오랜 협의를 통해 단계적·동시적 접근 필요성에 대한 공감을 이뤘는데, 워싱턴이 다시금 일괄타결식 접근으로 회귀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좀 더 긴 호흡으로 향후 협상을 준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평양은 향후 교섭에서 우위를 점 하기 위한, 혹은 열세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정지작업에 주력할 것이다. 즉, 앞으로 이뤄질 비핵화 협상에서 자국의 입장을 지지·지원할 우군을 확보하고, 운신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국제적 여론의 형성은 북한에 ‘선택’이 아닌 ‘필수’다.

이를 위한 최우선 협력 대상은 당연히 중국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처지가 녹록치 않다. 작년부터 트럼프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북 협상에서 나타난 중국의 부정적 영향에 대해 노골적 불만을 표시해왔다. 더욱이 현재 중국은 자국의 최우선 현안인 미국과의 무역협상을 앞두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시진핑이 김정은을 만나 북한을 직접적으로 지지·후원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은 여러모로 중국에 부담이 아닐 수 없 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만약 김정은이 가까운 시기에 서울 답방을 고려했다면, 그것은 2.28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전제로 한 것일테다. 미국과의 합의가 무산됨에 따라 앞으로도 상당 기간 북한에 대한 제재의 기존 틀이 유지될 수밖에 없고, 이런 조건하에서 남북 간 경제협력의 근본적 확대도 기대하기 어려운 여건이다. 김정은은 4,500km 철길을 달려 도착한 하노이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성과가 불분명한 서울 답방을 섣불리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자연스럽게 북한의 후순위 협력 대상인 러시아의 효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그동안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평화적 해결, 단계적·점진적 해법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자국의 입장을 지지·지원할 우군이 절실한 북한에 러시아는 현재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일차적 책임이 미국이 있고, 일괄타결 방식이 아닌 단계적·동시적 해 법의 필요성에 공감을 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나라이다.

중러의 전략적 공조와 북러 정상회담을 추동하는 미시적 요인 

이점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공조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역사상 최고의 밀월을 구가하고 있다. 양국은 1980년대 중반 관계 정상화의 계기를 마련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전략적 협력과 공조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다. 양국은 글로벌 차원에서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를 극복하고 다극질서를 구축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공유하고 있다. 이에 기초해 양국은 다양한 지역 현안에서도 각자 역할을 분담해 대응해왔다. 가령, 유럽·중동 현안에서는 러시아가 앞장서고 중국이 뒤를 받치고, 동(북)아시아 현안에서는 중국이 앞에서 끌고 러시아가 뒤에서 미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한반도 문제에서 중국의 이해관계 우선과 자국의 취약한 역내 입지를 인정하고, 중국 편승 정책을 토대로 영향력 확대 기회를 조심스럽게 탐색해왔다. 2017년 러시아가 중국과 공동 로드맵을 발표한 것이나,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 프로세스에서 독자적 행보를 자제하면서 신중한 태도를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러시아가 만약 향후 북한에 대한 가시적 지지·지원 행보를 보인다면, 그것은 현 시기 입지가 제한적인 중국과의 사전 공감과 역할 분담의 결과일 개연성이 크다. 미러관계의 현 상황도 김정은의 방러 가능성을 높이는 요소이다. 러시아는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양국관계를 전향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것으로 기대해왔다.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지 2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러시아가 품었던 기대는 점차 큰 실망과 좌절로 변해가고 있다. 더욱이 최근 미국이 일방적으로 INF탈퇴를 선언하고, 미 하원이 푸틴을 직접 겨냥한 제재까지 추진하자 모스크바는 당분간 양국관계의 냉각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북한 은 현재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국을 후원할 수 있는 나라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효용 가치에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러시아가 작년부터 김정은의 자국 방문을 적극적으로 요청해온 것도 북한에는 좋은 명분이다. 러시아는 작년 수교 70주년을 계기로, 그리고 올해에는 경제문화협력협정 체결 70주년이라는 연대기적 의미를 강조하면서 북러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김정은이 러시아가 그동안 보여온 우호적 접근 태도와 적극적 구애에 화답하여 푸틴과 회동하는 모습은 북한에 결코 손해가 아니며 오히려 방러 부담을 덜어주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북러 정상회담의 시기, 장소, 의제 전망과 정책적 시사점

북러 정상회담이 개최된다면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까. 일단 북러 사이의 그동안 논의를 고려하면 김정은-푸틴 간 정상회담은 김정은의 방러 형식이 확실시된다. 다만, 그 시점은 빨라도 올해 5~6월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중 정상회담 사례와 달리 김정은의 방러는 양국 간의 촘촘한 일정·의전 조율이 불가피하고, 따라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소는 러시아의 극동이 유력해 보인다. 두 차례 북미 정상회담에서 나타났듯 김정은의 전용기 순항거리가 세간의 예측보다 제한적인 것 같고, 모스크바까지 열차로 이동하기에는 번거로움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런점 을 고려하면 극동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가 김정은과 푸틴의 회동 장소로 선택될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김정은과 푸틴이 만나 어떤 논의를 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가 편파적으로 북한의 입장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모습을 연출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푸틴은 자국이 제시한 로드맵에 따라 한반도 비핵화·평화 구 축 프로세스가 진전을 이루고 있는데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북미 간의 건설적 협의를 중재·촉진하는 자국의 역할과 개입 명분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미 상호간 ‘이익과 양보의 균형’을 강조하면서 단계적·병행적 해법의 현실성과 대북 제재 완화·해제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더불어 북러 양국 사이의 전통적 우호관계를 토대로 향후 협력 강화에 대한 청사진과 계획이 제시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소외됐던 러시아의 등장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필자는 이를 꼭 부정적으로 볼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위자 수의 증가가 게임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는 우려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한반도 비핵화·평화 프로세스가 다수 이해당사자 간의 고차방정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 또 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러시아가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실제로 러시아는 한국과 더불어 교착 상태에 있는 북미 비핵화 협상을 재추동하고 긍정적 결과를 창출해 내는 데 있어 상당 부분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북한이 현재의 대화·협상 트랙으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견인해야 할 것이다. 북러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북한의 그릇된 상황 판단과 이 에 따른 군사적 도발이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 명확히 지적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함께, 러시아가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이후 예상되는 미국 내 협상 무용론과 강경노선 강화에 대한 견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 하노이 선언 채택 불발이 워싱턴의 전술적 퇴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일괄타결 방식의 해법에 대한 지나친 경도 또는 비핵화 초기 문턱의 과도한 확대는 비핵화 프로세스의 효과적 진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될 수 있다.

결국, 한국과 러시아는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이 영변지구 핵시설 폐기에 더해 추가적 조치 약속하는 등 좀 더 과감한 비핵화 행보에 나설 수 있도록 유도하는 한편, 미국이 이에 호응하여 현실적 상응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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