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지역 고속도로와 드레스덴 단상, 남북물류포럼>

                                       김영찬  한국외국어 대학교 외래교수

지난 8월 하순 독일의 옛 동독지역 할레(Halle) 연구소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꽤 긴 거리의 아우토반을 운전할 기회가 있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드레스덴을 거쳐 베를린에 갔다가 할레로 와서, 다른 루트를 통해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방향으로 보면 동북쪽으로 갔다가 남서쪽으로 온 것이고 이동 거리는 1,300㎞ 정도였다. 이중 대부분이 옛 동독 지역이었다. 이동하면서는 그 전과 사뭇 다른 느낌을 받았고, 오랜만에 들린 드레스덴의 변화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하다. 8월초 물류포럼의 독일통일 기행을 다녀오신 분들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실 수 있을 것이다.

독일 통일 후 고속도로는 동서유럽 연결하는 물류망으로 자리매김

통일 후 독일 정부는 동독지역의 낙후된 교통인프라를 개선하고 동서독간의 연결망을 복원하며 유럽 최대 물류 통행로의 원활한 교통 확보를 위해 철도, 도로, 수로를 포괄하는 「독일통일 교통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이중 고속도로는 3개의 신설노선과 기존 도로의 개보수를 포함해 1,930㎞에 달하는데 현재 거의 완료되었다. 정부가 여기에 신경 쓰느라 서독지역의 고속도로 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불만도 있었다.

독일의 고속도로를 소개할 기회가 있을 때 ‘속도 무제한’의 아우토반을 경험해 보려면 동독지역을 달려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 왔었다. 실제로 그간 동독지역에서 운전할 때 베를린 시내와 가까운 구간을 제외하면 꽤 속도를 내고 다녔었다. 그런데 이번에 몇 개 아우토반을 다니면서 앞으로는 유보적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속 200㎞를 즐길 정도의 구간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첫째, 화물트럭이 너무 많아서였다. 독일에서 화물트럭들은 상당히 얌전하게 다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방해받는다는 느낌은 받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도로의 끝 차선이 트럭으로 연이어 있었고 틈틈이 추월을 위해 중간차선으로 나오는 차들 때문에 흐름이 늦어지곤 했다. 많은 트럭들이 폴란드나 체코의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 통일이 이루어지고 동구권과 연결되면서 동독지역 도로가 얼마나 중요한 물류망이 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둘째, 도로 보수공사나 훼손구간이 심심치 않게 등장해서였다. 도로 보수와 훼손이라니. 대부분 새로 닦은 길일 텐데 왜 보수를 하고 훼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독일의 보수공사 방식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10㎞ 이상 단위로 공사하는 곳이 많은데 한쪽 방향은 막아놓고 다른 한 방향에 기존 차선 수만큼 선을 그어 운행시킨다. 당연히 차선은 매우 좁고 속도는 60㎞ 정도로 제한된다. 

공사기간도 긴데다가 실제로 공사를 하는 모습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좁은 차선으로 트럭과 섞여 몇㎞를 다닐 때면 정말 아찔하고 짜증이 난다. 그리고 대부분이 콘크리트 포장인데 도로 훼손으로 여기저기가 울퉁불퉁해져 있다. 서행하라는 표시가 계속된다.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거나, 화물트럭이 많이 다녀서, 아니면 금년 여름의 혹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몇 년째 완공이 미루어지고 있는 베를린 공항에 겹쳐서 독일도 어디가 좀 헐거워졌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독일 고속도로는 통행료가 없지만 대형화물차는 도로에 부담을 주므로 통행료를 낸다. 그런데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로 중간에서 볼 수 있는 “여기가 이전에 동서독간 경계선”이었다는 표지다. 이렇게 무심하게 지나치는 곳이 몇 십 년 동안이나 막혀 있었다는 곳이다. 인위적인 경계에 대한 허망함을 느끼게 되는 곳이다.

드레스덴의 변신

드레스덴은 반도체, 의약, 전기공학 등을 중심으로 통일 후 경제부흥이 잘 이루어진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다. 오랜만에 들린 드레스덴 도심 광장의 활기는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드레스덴은 작센(영어로는 색소니) 주의 주도이고 오랜 역사를 가진 경제·문화 중심지다. 번성했던 이 도시는 2차 대전 말기인 1944년 2월 소이탄을 포함한 영·미 공군의 궤멸적인 공습을 받아 수만 명이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이 폭격에 대해서는 군사적인 목적의 정당성을 두고 적잖은 비판도 있었다. 이후 동독 시절에 젬퍼 오페라, 츠빙어 궁전, 그리고 엘베 강가에 우아하게 서있는, 유럽의 발코니라 불리는 브륄의 테라스 등은 재건되었다. 

그러나 도시를 상징했던 성모교회(Frauenkirche)는 복구되지 않았다. 동독 정부는 무너진 돌들을 도시 중앙 한 곳에 모아놓고 ‘전쟁기념물’로 전시했다. 1994년 초 드레스덴을 처음 들렀을 때 도시의 건물들은 잿빛으로 어두웠고 교회의 잔해인 검은 돌무더기에는 일련번호가 붙여져 보관되고 있었다.

통일이 된 후 1994년부터 교회 재건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독일 내에서 이를 추진하는 협회가 조직되고 민간 모금캠페인이 전개되었다. 분단 후 서독으로 본거지를 옮겨왔던 드레스덴 은행(지금은 코메르츠 은행에 합병되어 사라졌다)이 모금을 주도했고 작은 돌 부스러기를 재료로 한 기념품 판매, 복권 판매 등 다양한 자금조달 방법이 동원되었다. 폭격에 가담했던 나라에서도 모금이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는 독일태생 미국인으로 노벨의학상을 받고 상금 전액을 기부한 블로벨의 주도로 ‘드레스덴의 친구들’이라는 비영리법인이 만들어졌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지원 모임이 결성되었다. 특히 황금십자가는 영국에서 모금되고 제작되었는데 공습에 참여했던 조종사의 아들이 제작에 참여했다. 높이와 규모가 큰 성모교회 재건에는 1억 8천만 유로, 지금 환율로 계산하면 2,40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었다. 

2005년 완공 소식을 접하면서 과연 그 정도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무너진 돌들을 쌓아 올려 더 의미 있어진 교회와 노이마르크트 광장은 여유로웠고 주변의 복구된 건물과 엘베 강의 테라스로 향하는 골목은 관광객이 꽉 들어찬 레스토랑과 카페들로 활기가 넘쳤다. 통일이 동독에 무엇을 주었는가를 느끼고 싶은 분들은 그 광장에서 드레스덴이 자랑하는 라데베르거(Radeberger) 맥주를 한 잔 드셔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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